seineee 2019. 10. 25. 01:35

어쩌다보니 여기에.
진짜 어쩌다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병원의 생각지도 못한 과에서 갑자기 수련을 받게 되었다.

사실 과를 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고픈 말이 많다.
오죽하면 어떤 교수님은 결혼은 다시 할수 있어도 수련은 두번 못한다며 전공 선택의 중요성을 엄청나게 강조했다. (김사부는 트리플 보드인데엽?!??)
전공선택은 단순히 자기가 밥벌어먹고 살 분야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과의 특성과 성격, 어떤 특이점까지 3-4년간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며 체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의 타의로 성격이나 가치관이 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혹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던 사람들도 물이 들긴 든다.

이전에 지원했던 과는 안과였는데
일단 서저리 파트고, cancer가 거의 없고, 스페셜티가 있다는 게 장점으로 와닿았다. 그땐 아이가 없었고 도전할 용기(?)가 있었다.
내 블로그를 봐왔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불합격 발표가 난 날에 임신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낙방에 크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생의 새로운 phase로 들어서게 됐다.

가장 빨리 수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시기는
19년 가을턴.
아이가 돌 쯤 되는 시기이기도 하고
최대한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보자 라는게 내 마음.

하지만 가을턴은
1. 일단 자리가 나야하고,
2. 내가 원하는 과 원하는 병원이어야 하고
3. 픽스가 없거나 나를 원해야 하는데
과연 이런 자리가 날 것인가..

기다리던 중에 어떤 자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고 가을턴 시험을 봤다.

사실 내가 생각했던 과가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1 하고싶은 걸 하면서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
2 일은 일대로 하고 남는 시간에 하고싶은 걸 하면서 보람을 찾는다
이 두가지 옵션에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와중에 아버님 상을 치뤘고, 많은 선생님들이 후자가 낫다고 조언해주셨다.

안과를 다시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아이를 낳고 직업적인 부분에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서
국시내신 고만고만한 기혼, 워킹맘 후보자와
미혼 남성 후보자 혹은 막 졸업한 20대 후보자가 있다면
아직까지 전공의=부려먹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한 이 세계의 꼰대들을 봤을 때
나같아도 나를 안 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안과 병원 홈페이지에 몇군데 들어가봤는데 여자 페이 닥터가 아무도 없었다.
지방도시의 한계인지..
아직도 그런 면에선 한참 뒤떨어져서 내 미래를 맡기기가 어려운 상황. 물론 헬로딩이나 가조가튼 분위기도 한 몫.
더이상 이상한 관습때문에 내 감정과 체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정말 안 가고싶은 과를 제외하면 어디든 가도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일할 거라는 마음은 있었다.
뽑아준다는 말도 안했지만 일단 안과는 룰아웃하고 -
결국 2번 선택지를 골랐다.

다행히도 합격을 했고 지금은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까진 만족하고 있다.
3년차 선생님이 지금 다시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할거냐고 몇번 물어봤는데 초반엔 좀 고민했지만 지금은 노노 ㅋㅋ
벌써 여기에 젖어들었다네 후후

아무튼 새 크록스를 샀다.
처음 의료선교 갈 때, 남편이랑 연애할 때 커플로 맞춘 후로 이번이 세 번째.
새 술은 새 부대에, 가 아니고
새 출발은 새 크록스로 하는 것이 내 직업의 특이 옵션이랄까.
졸국할 때까지 신을 수 있을까.
여기서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일단 걸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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