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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우리 동네 / 2008. 1. 29.



 나는 지금 사는 동네에서 벌써 12년째 살고있다. 처음 이동네에 왔을땐 초등학생 요금 70원을 내고 버스를 탔는데 지금은 천원을 내고 타는 성인이 되었다(물론 가끔 현질할땐 청소년요금을 내기도 한다). 


 우리 동네는 있는 것이라곤 인성고와 슈퍼 하나가 전부인 뭔가 동네스럽지 않은 동네이다.
상가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남들하는 것처럼 슬리퍼끌고 마실 나가면 몰래 담배피러 나온 고딩들과 마주칠 확률 60프로인 그런 동네. 영화나 만화책을 빌리거나 분식을 사먹는다거나 하는 나름의 문화생활은 고사하고 가끔 뭘 시켜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시켜먹지도 못하는 우리 동네는 말그대로 'suburban' 그 자체이다. 


 군대에 보면 하사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우리 동네 이름은 '하사관마을'이다.
정부 계획하에 이 마을에 집을 지어 하사관들에게 상급으로 수여하였다 해서 하사관마을이다.
덕분에 리모델링을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동네에 있는 빨간벽돌 집들은 평수만 다르지 내부구조가 모두 똑같다 할수 있겠다. 지금은 주인이 하사관인 집은 없고 두세번 정도 집주인이 바뀌었는데 재개발을 하려해도 뭔가 복잡한 법에 걸려서 아파트도 못 세우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모두가 주택인데다 애초에 찾기도 어려운 동네라서 짜장면, 피자, 치킨 등의 배달은 오히려 우리가 미안할 지경이라 사양하게 되었다.

<작년 3월 우리집 대문 : 지금은 은색문으로 바꿨다>

 초등학생 요금이 70원에서 300원으로 변하고(어른 요금은 500원에서 1000원으로 변했다) 인성마트가 주변세력을 장악하고 인성고 앞을 독과점하게 되는 12년 동안 우리 동네도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 같지만 정말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 기억을 더듬어 굳이 바뀐 것을 찾아보자면 길건너 파출소는 언제부턴가 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여긴 치안이 필요없나) 샛노란 어린이집도 생겼고 효천역도 깨끗하게 새 단장을 했다. 그리고 작년의 대대적인 버스노선 변경으로 우리동네에 다니는 버스가 5대로 확 줄었다. 그나마 한대는 3시간에 한대씩 다니고 다른 한대는 50분에 한대씩 다니니 사실상 25분에 한대씩 있는 나머지 3대를 믿어야 한다. 

<인성고 버스정류장>
 
 여전한 두 곳의 택시회사(택시회사가 있으면 택시가 자주 다닐 것 같지만 우리동네에서 택시타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한 쪽에 있는 여호와 증인의 왕국회관. 사실 이 두 건물만 봐도 우리 동네가 얼마나 구석지에 있는 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왕국회관이나 택시회사 둘 다 시내한복판보다는 공기좋은 교외에 있기 때문이다. 왜 정문을 두고 후문으로만 다니는 지 알 수 없는 인성고와 저녁만 되면 광주시내전역에 있던 헌혈버스들이 모여드는 광주전남혈액원. 해마다 그 안의 사람들은 바뀔지 몰라도 언제나 부동자세로 서 있는 건물들이다. 

 뭐 이렇게 특별난 것없는 우리 동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맑은 공기와 하늘이다. 유난히 사계가 뚜렷하면서 바뀌는 계절마다 다른 공기내음을 느낄 수 있는 우리 동네, 우리 집이 나는 참 좋다.

 

<봄이 되어 화분정리하는 우리 엄마>


 중학교 때는 매일같이 해가 지는 장관을 앞에 두고 보면서 집까지 걸어갔었고 막차타고 집에 가기 시작하던 대학교 초반엔 유난히 반짝거리는 별이 나를 설레게 했다.

 

<새벽출사 가던 날>


 새도 많고 벌레도 많고 지렁이, 민달팽이도 많고 고드름도 얼고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는 우리 집.
장마때는 산에서 내려온 물때문에 무릎까지 걷고 다니고 응달이 많아 한번 눈이 오면 3주동안은 꽁꽁 언 동네길에서 미끄러져도 역시 우리 동네만큼 날씨 확실한 곳도 없다.


<2007년 첫눈이자 마지막눈>


 버스도 빨리 끊기고 유난히 고장난 가로등이 많은 탓에 밤되면 무서운 우리동네지만 밤에 별 못보고 LP로 음악 크게 틀어놓지도 못하고 철마다 마당에서 피는 꽃 못보고, 그렇게 눈닫고 귀닫고 코막고 살기엔 이 동네가 너무 좋아져 버렸다. 그깟 동네비디오가게, 짜장면집이 대수냐. 졸업 전까지는 이 동네에 살 듯 하니 그때까지 나는 즐거운 Suburbanite로 살련다.

 

<마당, 아빠가 만든 야외용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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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쓴 글이니 벌써 3년묵은 글이다.
위에 말한 것처럼 정말 졸업하고 조금 더 살다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한 지 한달하고 몇일 되간다.
물가는 더 올랐고 버스배차 시간은 더 늘어나고(중요한 건 내가 운전을 한다) 이제 저 동네에 아파트도 생겼다.
더 큰 변화는 아파트 덕분에 상가가 새로 생겨서 기존에 있던 마트의 독과점 및 우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점 정도?

지금은 suburban조차 안되는, 하루에 버스가 끼니때 마다 다니는 시골마을로 들어왔지만
워낙에 주거에 있어서는 불편한(하지만 건강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차있고 전화터지면 오히려 이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제 지금 살게된 동네와 집에 대해서 글을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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