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nput

낙하산을 접어주는 사람

해마다 12월이 다가오면 자신이 쓴 시에 조언을 해 달라는 시인 지망생들의 요청이 들어온다.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응모 시즌이 된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시내를 걷다가 모 신문사 건물 밑에 붙은 '오늘 신춘문예 마감'이라는 표지가 눈에 띄었다. 신의 계시라 여기고 건물 안 신문사 문화부를 찾아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하니 원고지를 달라고 부탁했다. 다들 취재를 나갔는지 넓은 사무실에서 혼자 기사를 쓰고 있던 한 여성 기자가 의심과 불쾌감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볼펜으로 캐비넷 위에 쌓인 원고지를 가리켰다. 그녀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서, 외우고 다니던 시 몇 편을 써서 접수하고 나왔다.

1월 1일자 신문의 시 부문 당선자에 보란 듯이 실린 이름과 사진은 놀랍게도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즉흥적으로 응모한 것인데다, 심사평을 보니 최종심 3인 안에 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학교 수업도 빼먹으며 작심하고 준비해 기어코 그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상식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막내 누나의 연락을 받고 가 보니 한 벌뿐인 구식 양복까지 입고 와 계셨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누나에게 살짝 물었더니, 원래 말수가 없으셔서 잘은 모르지만 내 신춘문예 시상식을 보러 오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가족이 축하할 일이 결코 아니며, 더구나 '시상식 따위'는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도 아마 불참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거실에 앉아 계신 아버지도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정말로 불참할 필요까지는 없어서 후배 문학청년들을 대동하고 시상식을 마친 후, 상금으로 취하도록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튿날 내려가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겨울,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내 거처나 다름없던 대학로 학림다방에 있다가 저녁나절 막내누나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차비를 빌려 막차를 타고 고향 근처 도시로 내려갔다. 거기서부터는 버스가 끊겨 세 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 겨울밤, 마치 기억 속 풍경처럼 얼어서 희게 빛나는 금강을 따라 거무스름한 산짐승 몇 마리 외에는 아무 기척 없는 신작로를 걷던 일이 바로 어제 일 같다. 강물은 이어지는 삶의 순간들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내 삶의 일부는 그때 그 순간에 얼어붙어 있다. 내가 도착하고, 눈을 떠서 나를 한 번 바라보신 후 아버지는 곧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친 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늘 자물쇠를 채워 두시던 상자 안 빛바랜 봉투 안에서 흑백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20년을 살면서 멀리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 방랑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이국의 여인들과 배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그러고는 결혼을 하고, 줄줄이 태어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방랑을 접고 홋카이도의 벌목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서 다른 벌목꾼들과 함께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사진들과 함께 상자 안에는 내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 실린 신문이 단정하게 접혀 보관되어 있었다. 어디서 그 신문을 구하셨을까? 그리고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세상을 방랑하던 그 낭만적인 청년이 그 후 폐결핵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마지막까지 농사일을 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그 깃 좁은 양복을 어머니가 태워 버린다는 것을 내가 가지고 올라와 안감이 다 헤질 때까지 입고 다녔다.

얼마 전 델리에 사는 친구가 이야기 하나를 보내 주었다. 2차세계대전 때 많은 공을 세운 아난드라는 이름의 공군 비행대장이 있었다. 적진까지 출격해 중요한 군사기지들을 파괴함으로써 적의 전쟁 의지를 꺾어 놓은 인물이었다. 한 번은 적의 포격에 격추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낙하산을 펼쳐 탈출할 수 있었다. 제대 후에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카페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군대식으로 경례를 했다. 아난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며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하고 물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비행대장님을 잘 압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에 함께 계셨습니다. 전투기가 격추되었을 때 대령님은 낙하산을 타고 안전하게 착륙하셨지요. 그날 낙하산을 접어 대령님 전투기에 설치한 담당 병사가 저였습니다. 무사 생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했다. 그의 전문적인 낙하산 접는 실력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만약 제대로 접혀 있지 않았다면 제때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아난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공군 부대에 근무하면서 그 병사를 얼마나 많이 지나쳤겠는가. 하지만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자신은 장교이고 그는 사병이기 때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우리는 삶에서 우리를 위해 낙하산을 접어 주는 사람을 얼마나 인식하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기도해 주고, 중요한 순간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낙하산을 접어 주는 사람을 혹시 잊고 있지는 않은가?

시인 류시화 님의 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