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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턴이야기

Donor가 되어주세요

11월 어느 날이었다.
ER 나이트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전화 한통이 왔다. 
모르는 번호라 안받았는데 같은 번호로 두번째 걸려오자 잠에 취한 나 대신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조혈모세포 기증협회였다.

얼핏 깨어 들어보니 나와 HLA 매칭이 되는 환자가 있는데 조혈모세포기증이 가능할 지 물어보는 전화였고 나는 그 전화를 넘겨받아 비몽사몽간에, 하지만 항상 받던 콜을 받듯이 네 문자로 남겨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다시 쓰러져 잤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1년이라는 인턴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별의별 것들 중 뭔가 정점을 찍어줄 그런 사건이 생겼다고.
아유 드라마틱하구만, 책을 내도 되겠어. 이런 느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스토리를 위해 기증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범위는 일반인보다 훨씬 넓지만 내가 온전히 나의 무언가를 내어주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의료행위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였다.
일주일, 못해도 2박3일 정도는 병가를 내야했다.
앞으로 남은 과는 흉부외과, 신경과, 정형외과. 
셋다 빠지게 되면 짝턴들이 연당을 서거나 로딩이 엄청 늘어나서 이래저래 민폐인 곳이다.
내가 환자를 돕고싶은 마음조차 내 이기심처럼 느껴지는 인력부족에 이 결정이 옳은 것인가 고민이 되었다.
어차피 혈액검사도 해야하고 다시 매칭을 해봐야 하는 상황이라 최소 2달은 걸린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그 과에서 승인을 해줄지가 문제였다. 

우선 12,1,2월 짝턴들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그나마 병동당직제가 운영되면서 2월이 나을 것 같다고 했다.

두번째는 과에 연락을 드리고 수련교육부에도 말을 했다.
과장교수님과 부장교수님은 -본인들은 사실 내가 병가를 내든 어쩌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좋은 일한다는데.." 라며 허락해 주셨다.

세번째는 검사였다.
결과가 한 달정도 걸리고 추가검진 및 기증은 서울성모에서 하고 싶다고 했는데 혈액재검 상 매칭이 된다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내가 매칭이 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사실상 병원 선정부터 해서 채혈같은 간단한 일들까지 내가 병원에 있기때문에 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병원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바빠서" 어려운 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임신도 안되서 - 아직 할 생각도 없었지만 - 그것도 나름 스트레스였다.

병가를 내려면 정확한 날짜가 빨리 나와야 해서 몇번 푸시를 하긴 했는데 
여기까지 2달남짓, 걸려 1월이 되었다.

남편은 의사라서 잘알긴 하지만 걱정이 되서 그런지 여기저기 내과쌤들한테 문의를 해보았고
이전처럼 골수채취가 아닌 EPO맞고 수혈만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걱정을 덜은 상태,
아빠는 '의사의 길을 걸으세요' 라고 문자, 엄마는 '기도해보자'라고 문자.
시댁엔 설명이 길어지고 걱정만 하실까봐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 다음 글(metastasis)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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