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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공의이야기

2020 여름

1.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작년에 내가 들어오고 얼마 안 지나서 2년차쌤이 본인 여름휴가를 컨펌받았는데 겪어보니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
예전에 학교에서 일할 때 ‘선생님들이 미치기전에 방학하고 엄마들이 죽기전에 개학한다’고 했는데 딱 그 격이다.
휴가때문에 퐁당퐁당 당직을 계속 서다보니
병원일만 아니라 집안일과 육아 전부가 그저 스트레스원일뿐.
오죽하면 혼자 있고 싶어서 기숙사에서 누워있다 왔을까.

2. 독박육아캠프인줄 알았던 휴가는 생각보다 괜찮았고 돈을 쓰기만 하는건 정말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3. 윗년차쌤들이 말로 인계해준 주의사항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게되었다.
정말로 그만둘 뻔 했고 그 우연한 찰나에 장기파업이 시작되었다.

4. 첫 번째 단체행동 후에 인턴동기들과 뉴스를 돌려보는데 
댓글을 보고 너무 놀래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왜 연예인들이 댓글때문에 자살하는지 알겠더라.
어떤 프레임에 갇히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바뀌지 않고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손가락으로 나불거릴뿐.
댓글을 쓰는 사람이 일부라 하더라도 내상은 오래 간다.
아무것도 안하고 돈버는거 같으니 반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데다 댓글 쓴 사람들보다는 졸라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혐오감이 심할 줄이야.

5. 미친 놈들 때문에 코로나 폭탄이 빵 터지고 나서
(진짜 그 놈들 표현이 딱 맞아. 테러다 테러. 피해자인척 하니까 더 짜증나지만) 
이 시국에 파업한다고 욕 겁나 먹고있고
배부른 돼지, 최대집과 아이들 소리도 듣고 있고
(tmi이지만 나는 이 분 안뽑음... 회장의 의견이 모두의 의견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라 제발)
각종 언플과 내부 분열/와해 유발자 및 찌라시를 겪어가며
하다못해 맘까페에서도 욕먹고 있는 와중에
가장 기분이 나쁜 건 그도 결국 정치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는 거다.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게, 문케어 할 때도 그래. 그럴수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말도 안되는 걸 들고 와서 밀어붙이면서 대화를 외않훼? 시전하시니
내노라하는 대깨문 남편과 로동자의 딸 나는 뒷통수를 너무 제대로 맞아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댓글로 난리치는 건 무시하면 되지만 결국 권력자의 입장에서 국민을 공공재 취급하니...
하... 코로나 터지고 나서 전세계적인 반응들과 국민성을 보면서 이민가고 싶은 생각이 쏙 들어갔는데
파업하면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의사를 안하고 사는게 답인가 싶을 정도로.
국민들이 별로 안좋아하는 전문직에다 이 분야는 아주 우리집 전문가가 다들 계셔가지구...
없어도 살만하고 무시해도 괜찮은가보다.
그...재난영화같은거 보면 꼭 전문가 말 무시하다가 다들 큰 위험에 빠지거나 주옥되는데
우리가 볼모삼은건 내 삶이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는걸 좀 알아줬으면.

6. 이번 파업을 보면서 2020의 전공의들은 어떤 세대인가 돌아본다.
의전원/의대를 같이 지내왔고 의전원을 통해 의사가 되었지만 원래 설립의도엔 실패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6000명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창구가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쁘락치도 당연히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전공의가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전공의특별법에 의해 공식적으론 주80시간 근무하도록 되어있다. 물론 주에 80시간만 일했으면 좋겠다는 전공의들이 대다수이다. (시급으로 치면 최저시급도 안됨^^)
박지현 회장이 말했던 '우리 세대는 그렇게 훈계할 세대가 아니다' 라는 것에 동의.
사실상 더 잃을 게 없기에 어떻게든 파업지속가능. 물론 여기에는 공백이 최소화되도록 도와주시는 선배들과 간호사들, 의료진들이 있기때문.

7. 아무튼 오늘 사직서 내고 왔다.

8. 애가 요즘 너무 늦게 자서 죽을 것 같다. 당직보다 더 힘든 육아의 길.
그래서 사직 사유에 육아라고 썼다(?)
웃프게도 단체행동 참여하면서 제일 걱정됐던 건 내 일자리도 아니고 형사고발도 아니고
애가 병원어린이집 다니는데 사표썼다고 못다니게 하면 어떡하나 였다.
이 정도면 찐엄마 인정? ... 하...
각설하고 코로나+파업+두 돌 지난 기념인지 며칠간 집에서 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결국 급한 불끄려고 육아서를 몽땅 샀다.

9. 매번 반 해를 돌아보는 여름의 마지막 날이라 8/31을 의미있게 생각했는데
남들은 코로나 때문에 내 2020 돌려줘 라고 말하지만
2년차는 그럴 새가 없어서요... 이 악몽이 어떻게든 지나갔으면 좋겠네여...  

10. 결국엔 오늘도 여기에 또 외쳐본다. 나의 길은 어디인가. 인생은 끊임없는 진로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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