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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턴이야기

그들에게 필요한 것

의정부에 와서 처음 돌았던 과는 외과였고 나는 주치의를 하게 되었다.
오더는 4년차 선생님이 거의 다 해주셨지만 프라이머리콜과 동의서 받기, 회진 준비 등은 내 몫이었다.

외과는 정말 힘들었다.
그게 의정부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오자마자 주치의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갑자기 쏟아지는 콜이나 로딩이 이전과는 달라 약간 벅차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 담당으로 한 명도 돌아가신 분 없이 잘 마무리되고 도와주는 주변손길들이 많아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한 한 달이었다.

내가 맡게 된 파트는 상부위장관/간담췌 파트였다.
주로 위암, 장마비, 간암, 담석, 담낭염, 맹장염 환자를 봤고 간혹 위/장천공, 췌장암 환자들이 있었다.

췌장암은 silent cancer라고 해서 발병부위에 따라 발견이 아주 늦어 수술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술이 가능할 경우 - 췌장 머리쪽에 병변이 있는 경우- Whipple's op라고 불리는 대수술을 하게 되는데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잘라내고 소장을 끌어올려 위와 소장 중간을 이어준 후 
담도를 소장에 연결해주고 췌장 머리를 잘라낸 후 남은 꼬리부분을 소장 끝부분에 이어주는 수술이다.
말만 들어도 복잡한데 평균 8시간정도 걸리는 대수술이다.

이 수술을 하게되면 수술 후 기본적으로 중환자실로 입실하게 된다.
장시간 마취상태에 있었던 데다가 절제하는 부분이 많고 수술 후 케어를 위해서는 ICU care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술도 힘들지만 회복과정 중에 컨디션 저하나 패혈증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어
환자 연령이나 상태에 따라서 수술이 어려울 때가 있다.
병원에서 시행하는 의료행위는 생명연장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크더라도 장점이 더 크기 때문에 시행하는 일이 있고, 
장점은 있지만 다른 위험요소가 너무 클 때엔 아무리 좋은 방법도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고령에서의 모든 수술은 두 가지 모두에 속하게 된다.

외과에서 다른 과로 턴하기 직전에 이 휘플 수술 환자를 두 명이나 받았다.
한 분은 정작 본인은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데 
자녀가 너무(?) 많아 각자 교수님과 주치의를 찾아와 계속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상담을 수도 없이 해서 
수술도 전에 우리를 지치게 했던, 황달이 노랗게 왔던 할머니 환자였고 
(결국 수술 결정하는 날 하다못해 내가 보호자한테 '이제까지 교수님이랑 저희가 많이 힘들었던거 아시죠?'라고 말했다..)
할머니 체중이 너무 적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수술 며칠전부터 영양제와 수혈로 랩을 예쁘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수술에 들어갔고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빠른 회복으로 보호자와의 라포도 나아져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분이었다.

다른 한 분은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보이는 70대 할아버지 환자였고
본인의 치료의지가 아주 강하고 치료계획을 잘 따라주는 분이었다.
문제는 수술 전날 내가 너무 바빠서 동의서를 못 받은 것이었다.
보통 동의서는 환자 본인이 아닌 보호자에게 받도록 되어있고 밤늦게 병동에 가보니 보호자는 이미 집에 가고 없었다.
보호자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절대 못온다고 했단다. 자기 술마시고 있다고.

벙쪘다.
이렇게 큰 수술에 환자 혼자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되었는데 혼자 술마시고 있다고.
심지어 아들인줄 알았는데 전화해보니 딸이었다. 와야하네 말아야하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자고 있는 환자를 깨워 죄송하다고 백번 말하면서 10개가 넘는 동의서를 받고 있는데 보호자가 왔다.


가도 된다고 해서 갔는데 왜 다시 오라하냐 부터 시작해서 이미 화가 너무 많이 나있는 보호자에게
병원 규정이 이래서 그렇고.. 이런 말은 소용이 없었다.

보호자의 말은 이랬다. 
아버지가 이 수술을 안했으면 좋겠다, 4년차 선생님이 낮에 설명해줬는데 너무 위험이 크더라, 엄마도 이 병원에서 돌아가셔서 자기는 이 병원도 싫고 그런데 아버지가 저렇게 하겠다고 하니까 그냥 하라고 한거다. 하면서 속상하고 답답하고 무서워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했다.

나는 먼저 휘플을 했던 할머니환자 얘기를 하면서 물론 큰 수술이고 위험이 커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얼마전에 똑같은 수술하신 할머니도 지금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올라와서 회복 중이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내일 뵙자고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 했다.

그렇게 수술을 했고 그 환자는 내가 턴하기 직전에 곧 일반병실로 올라올 정도로 상태가 회복되어 병동에서 보호자와 함께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날 너무 속상해서 그랬다고.

결국 그 보호자가 원했던 것은 아버지가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과 격려와 위로였던 것이다.
너무 많은 선택지나 위험성이나 생길 수 있는 합병증이나 중환자실 입원일수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다.
아주 작은 시술에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건 아무리 완벽한 수술과 처치를 했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진짜 필요한게 뭘까.
알아도 내가 속시원하게 해줄수 있을까.
이래서 주치의가 더 어렵다고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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